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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먹는 것들

저물어 가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육식

by 김작희 2020. 9. 4.

Eater.com (Photo: Ditte Isager for Noma)


1. 요거트와 송아지고기

 

일주일에 두 번, 요거트를 만들기 위해 큰 더치오븐에 우유를 부어 넣는다. 

 

우유를 스토브에 올리고 중간 정도의 열로 데워, 끓어오르기 직전 버너에서 옮겨 화씨 130도까지 천천히 식힌다. 깨끗이 씻어 소독한 용기의 밑바닥에 요거트 한 큰술을 발라 두고, 130도의 우유에는 세 큰술을 넣어 액체와 완전히 섞일 때까지 잘 저어 준 후, 요거트를 바른 용기에 우유를 옮겨 닮는다. 유지방이 걸죽한 질감을 띠고, 요거트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뚜껑을 닫아 냉장한다. 이렇게 만든 요거트는 3주까지 냉장보관할 수 있는데, 그 3주 동안 유산균이 증식하며 맛이 점점 새콤해진다. 

 

우유를 반 갤런 사면 두 사람의 일주일 아침식사와 간식거리가 해결된다. 같이 사는 이는 요거트에 치아시드와 귀리를 넣어 오버나이트오트밀을 주중 아침식사로 먹고, 설탕이 없으면 기운도 머리도 쓰지 못하는 너는 요거트에 과일과 꿀과 견과류를 넣어 끼니를 때우거나, 케이크나 머핀을 구울 때 우유 대신 요거트를 넣기도 한다. 주말 브런치로 먹는 프리타타에도 우유나 크림 대신 요거트를 저어 넣는다. 

 

한국인의 식단에 유제품이 자리잡게 된 것은 아마도 식단이 총체적으로 서구화 -- 더 정확히는 북미화 -- 되기 시작하면부터이다. (박통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우리 국민들도 이렇게 우유를 마음껏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고 탄식했다는 일화를 들어 본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궁중음식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타락죽'의 '타락'은 몽골어의 '토락'에서 음차한 것 -- 몽골에 갔을 때 키릴 자모로 '토락'이라는 라벨이 붙은 낙타젖을 숱하게 보았다 -- 인데, 고려시대에 유입된 그 말이 계속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곡물 위주의 농경사회에서 동물의 젖을 먹는다는 것이 수 세기 동안 다소 이질적인 관념이었음을 반증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물론 주몽은 말젖을 먹고 자랐다고는 하지만, 유목 문화가 한반도 역사의 주류 서사로 편입되기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우유가 계속 생산되기 위해서는 어미소가 계속 임신과 출산을 해야만 한다. 송아지고기[veal]는 그런 낙농업의 부산물이다. 출산된 암송아지는 젖소로 길러질 수 있지만, 숫송아지는 낙농장의 우유 생산 기계로서는 쓸모가 없다. 성체가 될 때까지 먹여 기르기에는 비용과 시간 효율이 좋지 않으니, 육질이 부드러울 때에 도축하여 판다. 젖먹이 송아지의 살을 먹는다는 것이 비윤리적이라는 이들은, 유제품을 먹는 행위의 윤리성까지도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유대교에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 는 불문율이 있어, 정통 코셔 식단을 따르는 유대인들은 아직도 유제품과 고기가 함께 쓰인 요리를 먹지 않으며, 유제품에 닿는 식기나 조리도구를 육류에 닿는 도구들로부터 완전히 분리해 놓는다. 주변의 유목민 문화에 젖과 고기를 함께 요리해 먹는 종교 제례가 있어 그것과 차별화를 두기 위했다는 역사적인 설명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너는 그 금기의 본질은 아마도 생명에 대한 겸손과 예의에 일부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네 숨이 붙어 있기 위해 먹는 음식이 한때, 젖을 먹고 자라며 짝을 지어 번식하는 다른 목숨이었다는 것. 네 생명이, 네가 지금 목으로 넘기는 젖을 너와 함께 먹은 송아지의 생명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 흰 우유를 먹을 때조차도, 눈에 보이지 않는 송아지와 어미소의 살코기와 생혈을 잊지 말라는 것. 

 

그래서 너는 요거트를 만들 때마다 도축된 송아지를 생각한다.

 

 

2. 아는 것이 많으면 먹고 싶은 것도 많기에

 

大 피터르 브뤼헬 Pieter Bruegel the Elder, 눈 속의 사냥꾼들 Hunters in the Snow (1565)

생선을 마지막으로 먹은 것은 2주 전, 고기를 마지막으로 먹은 것은 벌써 서너 달 전이다.

21세기, 육식이 비윤리적이라는 사실은 굳이 여기에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른 생명을 해한다는 일에 앞서, 현대적, 특히 미국 방식의 대규모 축산업이 얼마나 환경을 해치는지(세계 돼지고기 소비량으로 1위인 중국에서 오히려, 환경 규제가 느슨한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 주로 돼지 사육을 아웃소싱하고 있을 정도이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짐승이 앓는 독감 정도에 불과하다는 구제역이 유행할 때마다 살처분되는 무시무시한 수의 가축들을 떠올린다면, 식물성 대안이 얼마든지 있는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서도 아닌) 단순한 '기호' 차원에서의 육식을 고집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선택인지는 너무나도 자명하다. (물론 건강상의 이유로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 만성 빈혈을 앓고 있고, 식물성 철분을 잘 흡수하지 못하는 너 역시 해당사항이 없지 않다. 혹시라도 미래에 임신을 했을 경우, 지금 식단으로는 부족하니 동물성 단백질을 꼭 섭취하는 것을 권장한다고 의사 선생님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미 85% 이상 채식을 하고 있음에도, 또 육고기 맛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채식주의 선언을 하지 않은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첫번째는 좋아하는 고향 음식의 맛이 달라지는 것이 싫어서이고 (사찰식 떡국도 있기야 있지만 사골국물에 고기 고명이 없는 떡국은 왠지, 타향살이를 하며 옅어지고 희석되는 한국에서의 기억이 그대로 맛으로 나오는 것 같아 서글프다), 두 번째는 남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을 때 맛조차 보지 않고 차려진 음식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이고 (환대[hospitality]의 법칙은 집주인뿐 아니라 손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니), 어쩌면 가장 별난 이유일 세 번째 이유는, 수렵과 목축은 어쨌든 인류 문명의 한 축이며 오랜 시간 전승된 삶의 방식이기도 한데, 그것을 온전히 삶에서 내치는 것은 모종의 지적 결핍이요 문화적 상실이라는 믿음이었다. 

뉴햄프셔 시골 출신의 동기는 아직도 추수감사절 휴일을 맞아 부모님 댁을 방문하면, 사슴을 사냥하고 도축해 고기를 소분한 후 냉동실에 보관하는 것이 연례의식이다. 냉장시설이 발명되지 않았을 시절 그의 조상들은 사슴고기를 염장하거나, 눈 속에 파묻어 지독하게 긴 뉴잉글랜드의 겨울을 났을 것이다. 그 삶의 방식을 보존하는 것은 어쨌든,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와 같은 중세 서사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에 지상에서 찾을 수 있는 조화로운 풍경의 대표 격으로 바흐의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브뤼겔의 사냥 장면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의 전통이다. 수렵을 하지 않아도, 다른 목숨을 빼앗지 않아도 스스로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풍요를 인류가 바야흐로 맞이했다고 해서, 수천, 수만 년을 이어져 내려 오는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식생활의 역사는 세계사와 직결된다는 클리셰는 바로 차치하고 -- 디아스포라의 식생활은 떠나온 고국과 새로이 정착한 타국 사이의 줄타기 같은 삶이, 그대로 식탁으로 오르는 것이다. 서러움과 결핍에 창의성과 생존의지가 버무려진 맛. 고려인들이 담갔다는 당근김치는 이미 한국에서 유명한 일례일 것이고 (러시아 친구들은, 정작 한국에서는 마르꼬프 빠-까레이스끼라고 하는 당근김치를 안 먹는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세계 곳곳으로 이주한 화교들이 만들어 낸 아메리칸 차이니즈 퀴진, 말레이-싱가포르 퀴진, 인도차이니즈 퀴진, 심지어는 한국식이나 일식으로 변형된 중화요리도 그 역사의 궤적이 꽤나 재미있다. 영국의 국민 요리라고 하는 치킨 티카 마살라 (사실 인도에는 '커리'라는 요리가 없다. 커리라고 하는 식물이 있고, 카디[kadhi]라고 하는 요거트 베이스의 수프는 있다. 향신료가 들어간 걸죽한 스튜와 수프를 영국인들이 싸잡아 '커리'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가 아는 커리와 '카레'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버밍햄과 같은 북부 도시의 골목을 메운 테이크어웨이 전문의 중국 음식점들은 모두 대영제국 전반을 걸쳤던 문화 교류와 인적자원 이동의 흔적이다. 미국 남부의 크리올 및 케이준 요리는 아프리카에서 납치되어 미국으로 실려온 '이민자'들이 고향으로부터 가져온 식재료와 향신료가, 프랑스식 요리법, 아메리카 대륙의 농작물, 또한 플랜테이션 내의 수직적 위계질서와 맞물려 탄생한 것이며,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파파이스, 하다못해 한국의 후라이드 치킨마저도 모두 플랜테이션식 식생활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

 

무용총 수렵도 (중국 길림성 집안현)

수렵한 사냥감을 분해하여 저장하는 풍습, 멍게를 채집해 젓갈을 담그는 전통 하나하나가, 매운 고추의 역사, 사워도우의 역사만큼이나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너인데, 채식을 하게 된다면 그건 비단 입과 몸의 결핍이 아니라 사유의 결핍이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커피와 초콜릿을 마시면서 기호작물의 식민사에 대해 생각하고, 그에 가미되는 우유의 문화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사람에게, 옷을 입고 집을 짓는 일만큼이나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의 한 부분을 담당해 온 육식을 아예 삶에서 내친다는 것은, 오랜 시간 알고 사용해 온 언어 중 하나를 갑자기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일만큼이나 부자연스럽고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 언어로 읽어 보지 못한 책, 들어 보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도 많은데. 함께 떠났던 부산 여행에서 애인이 돼지국밥 먹기를 거부했을 때, 네가 좋아하는 만두와 냉면집들을 모두 제치고 채식 식단이 그나마 가능한 식당들을 서울에서 골라 내야 했을 때 들었던 아쉬움의 원천도, 그 집 편수가 얼마나 맛있는데, 하는 생각보다는, 네 나라의 초상, 음식에 깃든 역사나 문화나 삶의 방식을 온전히 보여주고 알려주지 못한다는 답답함이 더 컸던 만큼, 너 자신의 식단에 있어서도 배움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이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우려였다. 자고새를 요리해 육즙과 함께 고기 맛에 맞는 소스를 졸여 내는 법, 얼음낚시로 잡은 파이크[pike]를 무스로 만드는 법, 토끼의 심장과 간을 푸줏간에서 얻어다가 파테를 준비하는 법, 아직도 완벽하게 만들지 못하는 치킨 키에프[chicken kiev]를 프로 셰프처럼 만들어 내는 법, 보르시에 골수[bone marrow]를 넣어 맛을 더하는 법-- 을 배우기를,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것. 

 

옛말은 틀린 게 하나 없다고, 아는 게 많으면 정말 먹고 싶은 것도 많다. 다만 그 옛말을 조금 더 자세히 풀어 본다면, 들은 게 많으면 만지고 냄새를 맡고 씹어 보아서 알고 싶은 것도 많아진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지 않나 싶다. 아는 게 많아 먹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은 사실, 알기 때문에 더 알고 싶은 것이고, 그 앎을 추구함에 있어서 먹는 것은 세상에 대한 또 다른 배움의 방식일 뿐이다. 



3. 실존적 빈핍으로서의 채식 

 

그런 너에게 최근, 너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약간의 심경 변화가 찾아왔다. 

 

그 이유라는 것에 사실 별다른 내막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2020년은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내려놓고 포기해야 하는 해이기도 했고, 그렇게 세계적으로 줄어들고 졸아든 삶의 반경과 크기를 관찰하고 재어 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언가를 느꼈을 수도 있다. 

 

그 심경 변화를 깨닫게 된 것은 생뚱맞게도, 먹는 얘기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번역가 미뢰유 간젤[Mireille Gansel]의 산문집 <이목[移牧]으로서의 번역>을 읽으면서이다. 

 

이목[移牧], 그러니까 이동 방목이란, 계절에 따라 고지대와 저지대를 천천히 옮겨 가며 가축에게 꼴을 먹이는 목축 방식을 일컫는데, 간젤은 시공간을 천천히 건너 다른 언어의 목초지로 텍스트를 인도해 가는 과정이 꼭 이동방목과 같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그 비유가 적절한지 어떠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너는 이동방목이라는 오래된 삶의 방식에 대해, 더 나아가 중세 태피스트리에 자수로 놓인 수렵 장면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던 것 같고, 그렇게 길어지고 짧아지는 해를 따라, 뜨겁고 선선한 공기를 따라, 짐승의 번식 주기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라면, 동물의 살과 젖을 먹는 인간 역시 어떤 조화로운 세계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 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블루 힐 앳 스톤 반즈[Blue Hill at Stone Barns]의 셰프 오너 댄 바버는, 가장 부드럽고 잡내가 없는 푸아그라는, 악명 높은 강제 급여 방식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농장에 풀어 기르는 거위가 겨울을 나기 위해 마음껏 먹이를 먹고 살이 올랐을 때에 얻어지는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공생과 균형에 기반한 식도락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그런 공생과 균형으로부터, 지금 네가 먹고 있는 고기까지, 의 거리를 생각했다. 


알프스 산자락을 오가며 먹을 만큼의 풀을 먹고, 좋은 토양과 목초의 맛이 풍성하게 배어든 고기와 젖을 내는 양과 소라면, 또는 사냥 철을 맞아, 무리의 개체 수에 큰 영향이 없는 선에서 수렵된 기러기나 야생 오리의 고기라면 -- 그런 육식이라면, 네가 동경하는 삶, 네가 동경하는 전통, 네가 동경하는 배움과 앎, 의 일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 북미의 도시에서 네 밥상에 오르는 고기에, 그런 경이나 균형이 깃들어 있을 확률은 무[無]에 가깝다. 비좁은 우리, 이미 죽어 나간 동족의 시체가 즐비하게 쌓인 축사, 그런 환경에서 너무도 당연히 증식할 박테리아와 병균을 막기 위해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항생제. 암탉이 하루도 쉬지 않고 알을 낳게 하기 위해 24시간 꺼지지 않는 불빛. 불법체류자 커뮤니티에 의존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비인도적인 도축산업의 근무 환경, 또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더더욱 준수되지 않는 노동법규의 악순환. 식수원과 토양으로 흘러들어가는 어마어마한 양의 축산폐기물, 오로지 육우를 먹여 기르기 위한 용도로만 재배되는 곡물, 그 곡물을 재배하기 위해 사용되는 농약, 낭비되는 수자원 -- 

이 또한 문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너는 이제, 그런 방식 -- 불균형과 과소비의 경제학, 부절제와 흘러넘침[excess]의 숭배 -- 의 육식으로 대표되는 문명에는, 적어도 당분간은,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마 너는 평생 채식을 만족, 풍요와 결부시키지는 못할 것 같다. 비건 쌀국수는 아무리 그 맛이 깊어도 쇠고기 육수가 들어간 쌀국수가 될 수 없고, 김밥에 든 두부부침에 고소함을 아무리 더해도 어릴 때 어머니가 출근길에 놓아두고 가신 삼천 원으로 동생과 햄 김밥 두 줄울 사 먹곤 했던 기억을 불러 오지는 못한다. 바닷가 벤치에서 싱싱한 생굴을 미뇨네트 소스와 함께 먹는 맛이, 식물에서 재현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자하손만두의 만두를 타지에서 맛보는 일을 포기하고, 타지에서 네 모국어를 모르는 이와 맞이하는 명절이 떠들썩하고 풍성하리라는 기대를 포기해야 하듯이, 네가 말하고 쓰는 언어가 이제는 어느 나라 사람의 귀에도 낯설다는 사실, 앞으로 부모님 얼굴을 몇 번이나 뵐 수 있을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하듯이 -- 육식을 네 삶에 있어 또 하나의 저물어 갊으로 여기기로 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지금과 같은 기형적인 육식 문화는 인류의 미래에 있어서도 저물어 가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 문화를 고수하여 모두의 삶과 자연을 갉아 먹으며 인류가 서서히 자멸을 초래하든, 균형과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는 다른 삶의 방식을 개척해 나가든, 공장식 축산으로 얻어진 먹거리를 당연시하는 삶은 이미 과거형이다. 매해 기록을 갱신하는 자연재해만 보아도, 기후변화로 인해 변모될 인류의 미래는 노아의 방주에 가깝다. 가져갈 수 있는 것, 가져갈 수 없는 것을 신중하게 골라야 하고, 무엇을 어떻게 먹여 기르고 무엇을 먹을지, 이미 한없이 작아지고 깨진 생태계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으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항로를 잡는 일이 절대 쉬울 것 같지는 않다.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이라면 어쨌든 축산업으로부터 손을 완전히 씻어 버릴 수 없고 (개는 잡식동물이라 채식 식단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고양이는 특정 필수 영양분을 육류 섭취로부터만 얻을 수 있다), 목소리와 근육이 큰 것을 제일로 아는 미국 주류 사회에서 공장식 축산을 뿌리뽑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육식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미 원주민에 한해서만 연어 사냥을 허용하는 몇몇 주의 법은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합법적인) 사슴 사냥으로 겨울을 나는 뉴햄프셔 시골 가족의 식생활 역시 더 나은 미래의 한 장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케이프코드에서 주말을 보낸다면 당일 바닷가에서 잡아 올린 생선 요리를 먹는 정도는 스스로 용인할 수 있을 것도 같고, (파인다이닝 커뮤니티에서 한때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노마[Noma]의 '새 시체 플레이팅'은 식도락과 산 목숨 사이를 가린 베일을 걷어냈다는 점에서 오히려 박수를 쳐 주고 싶다. 하루하루 먹는 음식, 사용하는 자원이 어디서 오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더 인도적인 대안, 더 지속 가능한 가능성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하는 것이 너의 궁극적인 바람이고, 너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ater.com (Photo: Ditte Isager for Noma)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그리고 적어도 (가장 행복하고 깨끗한 삶을 살다가 죽은 동물만 골라 먹을 돈이 없는) 너에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늘 채식을 하는 것이, 그런 고민을 삶으로 옮기는 가장 좋은 방식인 것 같다. 

 

 

(+. 떡국과 카리부 

해수면 상승으로 기후난민이 되었거나 곧 기후난민이 될 위기에 처한 미 전역 해안가 커뮤니티의 주민들을 취재한 엘리자베스 러쉬의 <라이징>은, 수 세기 동안 고수해 왔던 삶의 방식과 터전을 뒤로 하고 내륙 지방으로 떠나는 이들의 고충을 그대로 전한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옛 삶의 기억을 어떻게 보존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러쉬는, 페놉스콧[Penobscot] 족 원주민 커뮤니티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카리부 사슴은 아주 오래 전에 멸종했지만, 그들의 종교의식과 노래에는 아직도 카리부가 등장한다고. 

 

이제 한동안 먹지 못할 사골 떡국, 한동안 만들지 못할 치킨 키에프가, 네 삶에 카리부가 되어도 좋겠다.)